[우리문화신문=이무성 한국화가]
[우리문화신문 = 이무성 한국화가] ▲ 거리의 악사와 함께 흐느끼고 싶은 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어둔 밤을 적시는 La vien rose 거리의 악사가 토하는 생의 자화상을 본다그 흐느낌의 색소폰 소리에 내가 흩어져 사라진다어떤 인생이 장밋빛인가?해진 신발을 신고무거운 다리를 이끌고내가 없는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질긴 세월남은 발자국엔 빗물만 고인다청운의 꿈을 안고돈암동 전차종점에 내려가방을 들고 구부정하게 수 세월 넘던 미아리고개허기를 채우려 물을 많이도 마셨지대중가요 가사에한 많은 미아리고개라고 하지만나에겐 '희망의 고개'였지고개 밑 점성촌엔예나 지금이나 남의 운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자리하고시월의 늦은 밤그 미아리고개 밑 전차 종점에서흐느끼는 색소폰 소리'장밋빛 인생' 그 노년의 악사 옆에 나는.............. 돌처럼 서 있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무성 한국화가] 지난 5월 2일 경기민요 최고의 명창 묵계월 선생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리고 선생은 오늘 장례식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물론 선생의 소리는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겠지만. 선생을 떠나보내는 날 수많은 제자들은 물론 경기민요를, 한국의 전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의 사회로 추모공연을 열었다. ▲ 추모사를 하는 임정란 명창(왼쪽)과 김영임 명창(오른쪽), 추모노래를 하는 최근순 명창 ▲ 제자들 모두 추모노래를 함께 했다. 공연은 맨 먼저 한국국악협회 홍성덕 이사장의 추모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서 제자이며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 보유자 임정란 명창의 추모사 선생님 가시는 길이 이어졌고, 추모노래로 제자 최근순 명창의 이별가와 제자일동이 부른 적벽가가 추모객들의 가슴을 적셨다. 마지막으로 선생의 제자 김영임 명창의 초모사가 이어졌다. 공연이 끝난 뒤 영결식이 있었고, 모든 행사가 끝난 11시 운구행렬은 서초구 원지동 화장장으로 떠났다. 이후 주검을 화장한 뒤 경기도 분당 메모리알공원묘지에 선생을 모실 예정이다. ▲ 고 묵계월 명창 영결식 장면
[그린경제/얼레빗 = 이무성 한국화가] 여기는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산다는 황거 앞이다. 도쿄 관광 코스에는 꼭 들어 있다는 필수코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관광만 할 수 없는 유적지다. 앞에 보이는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1924년 1월 5일 관광객 틈에 몸을 숨긴 채 김지섭 의사는 황거를 향해 수류탄 3개를 던졌다. 당시 습기를 머금은 수류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었던 거사 장소인 것이다. 가까운 곳의 사쿠라다몽(櫻田門, 고려문) 곧 황거로 들어가는 문에서는 1931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투척이 있었다. 일제는 당시 조선을 우습게보았겠지만 이 두 지사의 거사는 그야말로 조선인의 기개를 여지없이 보여준, 그래서 일본 경찰과 일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쾌거였다. 한국인들이여 황거 앞 이중교와 사쿠라다몽에 가거든 우리의 영웅 김지섭과 이봉창 두 지사를 꼭 기억하라!
[그린경제/얼레빗 = 이무성 한국화가] 동풍이 불거든 너의 향기를 보내다오. 매화여 ! 주인이 없다 하여 봄을 잊지 말아라. 위는 우에노공원에 매화 옆 팻말에 있는 스가와라미치자네의 시다. 매화를 사랑한 시인이요, 학자인 스가와라노미치자네 (菅原道真, 845~903)는 다섯 살에 와카(일본 고유의 시)를 짓고 열 살부터 한시를 척척 짓던 신동으로 알려져 있다. 교토의 유명한 신사인 기타노텐만궁(北野天満宮)에서 학문의 신이자 천신(天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스가와라노미치자네는 그 조상이 신라계로 집안을 간략히 소개하면 신라왕자 천일창 일본 스모의 조상 노미네(野見宿禰)하지(土師)스가와라(菅原) 씨로 개성(改姓)하여 오늘에 이르는 인물이다. 스가와라노미치자네는 학자와 고급관리로서 뿐만 아니라 방대한 시와 산문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간케분소, 管家文草〉〈간케코슈, 管家後集이 있으며 역사 편찬에도 참여해 루이주코쿠시, 類聚國史와〈일본삼대실록, 日本三代實錄에도 관여하는 등 58살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 말년에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병마와 싸우다 죽어간 스가와라는 매화를 사랑하여 부인과 멀리 떨어져
[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무성 한국화가]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어떤 이는 야스쿠니를 왜 가느냐고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어떤 속셈으로 야스쿠니를 움켜쥐고 있는지 확인하고픈 생각이었다. 신사는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었지만 신사 옆의 유취관에서 그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전쟁을 미화하고 자랑하는 그들. 결국 다시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가미가제 전투기를 뭐가 자랑스럽다고 내놓고 칼이란 칼은 종류별로 온갖 것을 다 진열해 놓았다. 더구나 위압적인 동상은 칼을 빼들고 누구의 목을 자를려고 하는 것인가? 사무라이 칼이 저렇듯 섬득한 것인가? 전쟁을 찬양하는 온갖 책들 그런 것들을 전시하면서 그들은 800옌을 입장료로 받는다. 확인하기 위해서 800옌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지만 800옌이 두고두고 아까운 것은 왜 일까? ▲ 누구의 목을 자르려 칼을 빼들었나?
[그린경제/얼레빗 = 이무성 한국화가] 이번 미국 서부관광 여행에서 첫 번째 행운은 가이드 김선용 씨를 만난 일이다. 차분하면서도 위트 있는 재담으로 지나는 곳곳을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꼼꼼히 설명해 주는 그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정체성을 자긍심으로 삼고 현지 생활에 적응 하고 있다고 한다. 무역업을 하다가 여행가이드업이 좋아서 이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 자랑스러운 한류 최고 가이드 김선용씨와 함께 한때 현지(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백인 동료가 몹시 괴롭히며 천대를 했는데 어느 날 그가 Go back to your home( 너희 나라로 가라) 이라고 해서 Me too( 너도 가라) 고 맞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선용씨는 그 백인동료에게 원래 이 땅은 우리 조상의 땅이다. 인디언이라고 붙인 이름은 백인들이 인도사람 같다고 멋대로 붙인 이름이지 원주민이 인디언이 아니야. 평화롭게 살고 있는 우리 조상들을 죽이고 빼앗은 너희 선조들 후손이 감히 자기 땅 이라니. 라고 쏘아주었단다. 또한 흑인 동료도 비슷한 말을 해서 그 흑인에게 너도 너희 나라로 가라고 했더니 그의 대답이 우리 조상은 노예로 끌려와서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더란다. 세종대왕님
[그린경제/얼레빗 = 이무성 한국화가] ▲ 모하비 사막에서 발견한 태극기, 한국인 부동산 가게 ▲ 1850년 세웠다는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동산, 이곳에는 일요일마다 먹거리장터가 열리고 있다. ▲ 흉악범들을 가뒀던 곳으로 유명한 교도소가 있던 알카트라섬 영화 빠삐용도 이곳에서 찍었다고 하며, 지금은 관광지로 한몫 하고 있다. ▲ 장관인 요새미티 국립공원 ▲ 요새미티 국립공원에서 인증사진 한장
[그린경제=이무성 한국화가]
[그린경제=이무성 한국화가] S-Line이라고 영어로 쓰기 보다는 호리병미인이라고 쓰면 어떨까?